검색결과8건
프로축구

[카타르 스타 TMI ④] 손흥민 동료 벤탄쿠르, 우루과이 중원의 '산소탱크'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이 오는 21일(한국시간) 개막한다. 일간스포츠는 한국과 함께 H조에 속한 우루과이, 가나, 포르투갈의 주요 선수들을 낱낱이 분석해 보는 코너를 마련했다. 손흥민(30)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EPL) 토트넘에서 함께 뛰는 로드리고 벤탄쿠르(25·우루과이)는 한국 팬에게도 익숙한 선수다. 같은 소속팀에서 활약하는 두 선수는 월드컵을 앞두고 장난 섞인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다. 벤탄쿠르가 “손흥민에게 이미 조심하라고 말했다”고 하자, 손흥민은 “‘월드컵에서 우리와 만나는데 너네 (팀은) 떨어지겠다’라고 농담했다”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벤탄쿠르는 토트넘 중원에서 없어서는 안 될 핵심 선수다. 중앙 미드필더가 갖춰야 할 능력을 고루 잘 갖춘 '육각형 선수'다. 볼 탈취 후 간결하고 짧은 터치로 EPL 정상급의 패싱력을 선보인다. 체격(1m87㎝·72㎏)이 큰데도 남미 특유의 가벼우면서도 유연한 움직임으로 상대 압박으로부터 벗어난다. 수비력도 준수해 수비형 미드필더로도 활용할 수 있다. 벤탄쿠르의 최대 장점은 왕성한 활동량이다. 히트맵을 살펴보면, 경기장 전반에 벤탄쿠르의 움직임이 포착될 만큼 공격에 많이 관여한다. 토트넘의 ‘산소 탱크’다. 투쟁심이 커 상대 선수를 향한 거친 태클도 서슴지 않고 한다. 콘테 감독이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에서 벤탄쿠르와 데얀 쿨루셉스키를 데려온 것이 토트넘 근래 최고의 영입이라 평가받는다. 스위스 이민자들이 정착한 우루과이 남서쪽의 누에바 엘베시아 출생의 벤탄쿠르는 낙농업을 하는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부모의 일을 도우면서 공을 차며 유소년기 시절을 보냈는데, 네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 벤탄쿠르는 어머니를 추모하는 의미로 어머니의 생일인 등번호 30번을 사용한다. 우루과이 대표팀에선 등번호 6번을 선택했다. 벤탄쿠르는 새어머니의 보살핌 속에 축구 선수의 꿈을 잃지 않았다. 또래 선수들보다 키가 월등히 컸던 벤탄쿠르는 축구 선수였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능을 보였다. 우루과이 명문팀 보카 주니어스 유스팀에서 기량을 갈고닦아 프로에 데뷔했고, 2017년엔 에콰도르에서 열린 남미 20세 이하(U-20) 챔피언십에서 우루과이의 우승에 일조했다. 벤탄쿠르는 더 큰 무대로 나아갔다. 2017년 이적료 950만 유로(130억원)에 유벤투스와 계약했다. 유벤투스에서 다섯 시즌을 보내는 동안 리그 우승을 세 번 이끈 벤탄쿠르는 2022년 초 토트넘으로 이적했다. 그는 올 시즌 토트넘이 소화한 공식전(20경기) 중 리그 1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를 뛰었다. 콘테 감독의 무한한 신뢰를 받으며 절정의 기량을 과시 중이다. 벤탄쿠르는 2017년 남미 U-20 챔피언십 우승, FIFA U-20 월드컵 4위에 오를 당시 우루과이 대표팀을 10년 이상 이끌 재목으로 주목받았다. 그는 2018 러시아 월드컵에 우루과이 대표팀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해 10월 12일엔 한국과 A매치에서 선발 선수로 출전해 후반 29분 황희찬에게 태클을 시도해 경고 카드를 받기도 했다. 올해 2월 1일엔 카타르 월드컵 남미 예선에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경기 시작 1분 만에 A대표팀 데뷔골을 넣었다. 김영서 기자 zerostop@edaily.co.kr 2022.11.10 06:0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한국의 대척점에 있는 축구 강국은?

지구는 둥글다. 따라서 대한민국에서 수직으로 1만2000km를 파고 내려가면 지구의 정반대편이 나온다. 이러한 곳을 대척점(antipodes)이라고 한다. 대척점에 위치한 두 지역은 계절과 낮밤이 반대다. 대한민국의 대척점은 어디일까? 이 질문에 답하기에 앞서 지구 표면의 70%가 바다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기억하자. 즉 대척점이 서로 육지인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는 얘기다. 육지로 이어진 대표적인 대척점은 북극과 남극, 그리고 동아시아와 남미 대륙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대척점은 우루과이 앞바다다. 육지로 이어진 우루과이와의 대척점은 전라남도 진도군과 신안군뿐이다. 제주도의 육지 대척점은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국경지대다. 따라서 우리는 흔히 우루과이를 대한민국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나라라고 말한다. 이러한 인연을 가진 우루과이와 한국이 2022 카타르 축구 월드컵 첫 경기에서 맞붙는다. 16강 진출을 위해서 한국대표팀은 우루과이를 꼭 넘어야 한다. 국내 축구 팬들은 루이스 수아레스로 대표되는 2010년대 이후의 우루과이대표팀에 익숙한 편이다. 하지만 우루과이나 그들의 축구에 관한 전반적인 이해도는 떨어진다. 우루과이는 한국보다 국토가 1.8배 크다. 인구는 단 350만 명에 불과하다. 이 나라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있지만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아르헨티나와 훨씬 가깝다. 인구 구성도 아르헨티나와 비슷하다. 우루과이는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중심으로 유럽에서 이주한 백인(인구의 88%)이 주류인 나라다. 오랜 우방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관계를 미국과 캐나다에 비유할 때도 있다. 캐나다가 미국을 큰 형 같이 여기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의존하듯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의 옆집 형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두 나라는 국기(國旗)도 비슷하게 생겼다.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를 상징하는 5월의 태양(Sun of May)은 위치만 다를 뿐 두 나라 국기에 등장한다. 하늘색은 두 나라를 상징하는 색깔이다. 우루과이가 더 진한 색을 쓸 뿐이다. 형제국가 같은 두 나라도 축구에서는 라이벌이다. 아르헨티나보다는 우루과이에게 더 중요한 라이벌전이지만 말이다. 하지만 2014년 수아레스가 바르셀로나로 이적하고, 리오넬 메시와 팀 동료로 좋은 관계를 보여주면서 라이벌 관계가 많이 희석됐다는 견해도 있다. 아울러 두 나라 팬들은 한 나라가 제3국과 경기를 하면 서로를 응원한다. 예를 들어 우루과이가 독일과 경기하면 아르헨티나는 우루과이 편을 드는 식이다. 특히 과거에 전쟁을 벌이기도 했던 앙숙 브라질과 붙을 경우, 두 나라는 똘똘 뭉친다. 우루과이에 축구를 처음 전파한 이는 19세기 중·후반의 영국인 이민자들이었다. 1891년 창단된 알비언(Albion FC)은 이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클럽인데, 클럽명만 봐도 영국의 흔적이 드러난다. 알비언은 잉글랜드 혹은 브리튼 섬을 가리키는 옛 명칭이다. 20세기 초반에는 사우스햄튼을 시작으로 여러 영국 클럽이 이곳을 방문하여 우루과이 축구 발전에 기여했다. 우루과이는 축구에 관해 선구자 같은 역할도 했다. 1902년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와 경기를 갖는다. 영국(UK)을 구성하는 홈 네이션스(잉글랜드, 스코틀랜드 등)가 서로 맞붙은 경기를 제외한 최초의 국제 경기였다. 이후 두 나라는 지금까지 무려 197번 경기를 벌였다. 축구 역사상 이들보다 더 많이 맞붙은 국가는 없다. 1930년 첫 대회가 열린 FIFA(국제축구연맹) 월드컵도 우루과이가 개최했다. 초대 챔피언도 결승에서 아르헨티나를 4-2로 이긴 우루과이였다. 이들은 1950년 개최된 4회 월드컵에서도 결승에서 개최국 브라질을 2-1로 이겨 두 번째 우승을 거둔다. 우루과이 대표팀 셔츠 엠블럼에 새겨진 4개의 별에 의문을 갖는 팬들도 있다. 월드컵에서 2번 우승한 나라가 2개가 아닌 4개의 별을 붙였기 때문이다. 이유가 있다. 우루과이는 1회 월드컵이 열리기 전인 1924 파리 올림픽과 1928 암스테르담 올림픽 축구에서 우승했다. 1924년 이전의 올림픽에는 아마추어 선수들이 나왔고, 1928년 이후에는 올림픽 축구에 나이 제한이 생긴다. 따라서 FIFA는 그들이 주관한 1924, 1928 올림픽 축구 챔피언만 세계 챔피언으로 인정하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시작해 지금은 각 종목으로 퍼진 셔츠 스폰서십도 우루과이의 최고 명문 팀 페냐롤(Penarol)이 원조다. 비록 이 스폰서십의 자세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1950년대 페냐롤에서 시작된 셔츠 스폰서십은 1960년대에 유럽으로 건너간다. 2000~2010년 사이 우루과이는 무려 1414명의 선수를 해외에 수출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선수의 해외진출 숫자와 비슷하다. 아르헨티나(4700만 명), 브라질(2억 1000만 명)과 우루과이의 인구 차이를 고려하면 이 나라가 엄청난 축구 인재풀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2030년은 월드컵 축구가 탄생한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회 월드컵이 자국에서 개최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 칠레, 파라과이와 2030 월드컵 공동 개최를 노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보단 스페인-포르투갈 연합이 100주년 월드컵 유치에 유리할 것 같다. 우루과이 축구는 1970년대 이후로 침체기를 겪다 2010 남아공 월드컵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정상급 팀으로 거듭난다. 이들 축구의 황금세대가 뛸 마지막 2022 월드컵에서 우루과이가 어떠한 성적을 거둘지 관심이 모아진다. 한국과 우루과이가 나란히 조 1, 2위로 예선을 통과해 16강에서 브라질과 우루과이의 오랜 라이벌전이 벌어지길 필자는 기대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9.14 07:0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차별은 차별을 낳는다, 이탈리아 축구의 인종차별③

‘엄마 찾아 삼만리’라는 동화가 있다. 이탈리아 제노바에 사는 마르코의 엄마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보탬이 되고자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 아이레스로 일을 찾아 떠난다. 엄마는 이탈리아의 가족에게 매달 편지를 보내 안부를 전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식이 끊긴다. 결국 12세 어린 소년 마르코는 머나먼 아르헨티나로 엄마를 찾아 혼자 떠난다. 이 얘기의 원작은 이탈리아 작가 에드몬도 데 아미치스가 1886년에 펴낸 ‘아펜니노 산맥에서 안데스 산맥까지(Dagli Appennini agli Ande)’다. 국내에는 일본에서 제작한 애니메이션으로 널리 알려졌고, ‘엄마 찾아 삼만리’는 한글 번역명이다. 역사적으로 유럽에서 이탈리아는 아일랜드와 함께 많은 이민자를 보낸 국가였다. 이탈리아 최초의 대규모 이민은 동화 속 마르코의 엄마가 떠난 시기인 1880년대에 시작되어 1920년대까지 이어졌다. 이민의 주된 이유는 가난이었고, 이들이 주로 정착한 곳은 북미와 남미였다. 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리아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승전국이 됐지만, 그다지 큰 이득을 얻지 못했다. 1920년대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이탈리아에서 베니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 당을 창설하고 정권을 잡는다. 추축국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탈리아는 종전 후 대규모 이민을 다시 시작했고, 이는 1970년대까지 이어졌다. 1880년대부터 약 100년간 이어진 이민역사에서 고국을 떠난 이탈리아인은 무려 1500만 명에 이른다. 미국으로 이주한 이탈리아인들은 광범위한 차별을 겪게 된다. 미국 사회에 이미 정착한 앵글로 색슨과 북유럽 출신들에게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백인이 아닌 데고(Dago, 이탈리아 혈통을 부르는 모욕적인 의미의 속어)였기 때문이다. 유럽인이라고 다 같은 백인 취급을 받은 것이 아니다. 백인내에서도 계층이 존재했고, 이탈리아 이민자 중 특히 남부 출신들은 올리브색 피부를 가진 관계로 ‘2류 백인(second-class white people)’으로 간주됐다. 게다가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주로 카톨릭 신자였음으로, 개신교가 주류인 미국 사회에서 차별의 대상이었다. ‘백인’ 취급을 받지 못한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미국 사회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는다. 또한 미국의 대중 매체는 이탈리아인과 범죄 등을 엮어 보도함으로써 이들이 폭력적이고 범죄 조직과 연관돼 있다는 편견을 만드는 데 일조했다. 이러한 편견에 의해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경제적으로 착취당했고, 때로는 폭력에 희생됐다. 대표적인 사례가 1891년 3월 뉴올리언스에서 벌어진 집단 린치 사건이다. 지역 경찰서장 헤네시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된 이탈리아 이민자 9명이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자, 시민들이 폭도로 돌변해 교도소에 난입한다. 수천 명으로 늘어난 폭도들은 감옥에 있던 총 11명의 이탈리아인을 살해했다. 린치에 가담한 폭도들은 기소되지 않았고, 뉴욕타임스는 사설에서 이탈리아 범죄자에 대한 경고라는 극찬까지 마다치 않았다. 1928~2002년 사이 이탈리아인과 연관된 1233편의 미국 영화 중 69%가 이탈리아 사람을 부정적으로 묘사했다고 한다. 특히 1972년 개봉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대부(The Godfather)’가 메가 히트를 기록한 이후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했다. 영화 ‘대부’ 이후 30년 동안 이탈리아계 미국인을 범죄자로 다룬 영화가 무려 300여편이 나왔다. 또한 영화에서 이탈리아인이 긍정적으로 묘사될 때는 이들은 조연에 머물렀다고 한다. 하지만 이탈리아 캐릭터가 주연일 때 이들을 편견 없이 다룬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렇듯 이탈리아인은 편견과 차별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런 이탈리아가 서유럽에서 가장 인종차별적인 국가라는 사실이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최근 이탈리아 축구의 인종차별과 관련해서 이름이 자주 언급되는 클럽이 있다. 바로 이탈리아 반도 서쪽 지중해에 있는 사르데냐 섬의 중심 도시 칼리아리를 연고지로 하는 칼리아리 칼치오(Cagliari Calcio, 칼치오는 이탈리아어로 축구를 의미)다. 칼리아리 팬들이 저지른 차별사례를 살펴보자. 2018년 1월 블레이즈 마투이디(유벤투스)는 칼리아리의 홈구장인 ‘사르데냐 아레나’에서 인종차별을 당했다. 2019년 4월 모이스 킨(유벤투스)은 칼리아리 팬으로부터 경기 내내 원숭이 구호를 들었다. 이에 킨의 팀 동료들은 심판에게 항의했고, 칼리아리의 주장 루카 체피텔리까지 홈 관중에게 달려가 구호를 멈출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2019년 9월에는 결승골을 터트린 로멜루 루카쿠(인터 밀란)가 역시 칼리아리 팬으로부터 원숭이 구호를 들었다. 2022년 3월 칼리아리 팬들은 다시 한번 원숭이 구호를 AC 밀란의 키퍼 미케 메냥과 수비수 피카요 토모리에게 외쳤다. 이렇게 이들의 인종차별은 악명이 높다. 이탈리아는 지역 차별로도 유명한 나라다. 대표적으로 북부에서 남부를 차별한다. 사르데냐는 반도의 북부 사람들에게 사람을 벌 줄려고 보내는 귀양지나 머나먼 오지인 아프리카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에 1960~70년대 이탈리아 북부 지역의 축구 선수들은 칼리아리로 이적하는 것을 무척 꺼렸다고 한다. 사르데냐는 오랫동안 열강들의 패권 다툼에 시달렸으나, 그들만의 고유한 문화와 언어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탈리아 반도를 지배했던 사보이 가문을 비롯해 20세기 파시스트 정권은 섬을 본토에 결속시키기 위해 이들의 언어를 금지했고, 이탈리아어를 강요했다. 2차 대전 후에는 본토의 경제 성장에 동참한다는 명목 아래 섬의 고유문화를 야만의 유산으로 간주해 없애기도 했다. 이렇듯 사르데냐 사람들도 피해자였다. 하지만 그런 아픈 과거를 가진 사르데냐의 칼리아리마저도 이탈리아 축구 인종차별의 대표적인 가해자로 변모한 것이다. 학대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이 학대를 가한다는 연구결과가 다수 있다. 비슷한 맥락으로 갑질과 차별을 당한 이들이 자신보다 약해 보이는 상대를 찾아 갑질과 차별을 가하는 경우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이 차별을 받았다고 혹은 견뎌냈다고 해서 다른 이들을 차별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탈리아 축구는 인종차별에 엄중한 처벌을 내려 차별과 혐오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2.08.10 07:0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축구, 그 이상의 축구 '올드 펌 더비'

라이벌 팀 간의 경기는 선수나 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축구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지역에 기반을 둔 라이벌 팀 간의 경기를 ‘로컬 더비(local derby)’ 혹은 줄여서 ‘더비’라고 부른다. 영국 영어는 다비(DAR-bee)로 발음한다. 잉글랜드에는 유명한 더비 경기가 꽤 많다. 특히 아스널과 토트넘의 북 런던 더비와 리버풀과 에버튼의 머지사이드 더비가 국내 팬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다.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라이벌전이자, 세계적으로 알려진 엘 클라시코는 문화·정치적 차이를 배경으로 한 두 명문 클럽의 대결로 유명하다. 하지만 두 도시간의 거리는 차로 7시간이 걸릴 정도로 멀어서, 엄밀히 말해 엘 클라시코는 더비 경기가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치열한 더비는 올드 펌(Old Firm)이다. 올드 펌 더비는 스코틀랜드 최대의 도시 글래스고우를 연고로 하는 셀틱 FC와 레인저스 FC의 라이벌전을 의미한다. 스코틀랜드 축구를 대표하는 두 클럽 간의 경쟁은 스포츠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16세기에 나타난 종교개혁으로 인해 스코틀랜드의 국교는 가톨릭에서 신교의 한 교파인 장로교로 변한다. 1840년대 대기근의 여파로 아일랜드에서 스코틀랜드로 건너온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글래스고우의 동쪽에 정착했다. 당시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성가신 존재였다. 특히 이들의 대부분은 가톨릭을 믿었기 때문에, 신교도가 압도적으로 많은 스코틀랜드에서는 환영받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장로교를 믿는 원주민들과 가톨릭교도들 사이에 주택과 고용 문제를 두고 경쟁이 벌어졌다. 그룹 간의 갈등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전통적으로 셀틱은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가톨릭교도의 지지를 받아왔다. 또한 정치적으로 셀틱 팬들은 사회주의 이념을 가진 노동당을 지지한다. 글래스고우의 남쪽에서 1872년 창단된 레인저스의 지지층은 스코틀랜드의 원주민이자 신교도 들이다. 전통적으로 팬들은 레인저스가 영국 왕실과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연합을 포용하는 영국 클럽(British club)인 점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정치적으로 이들은 보수당을 지지한다. 레인저스는 오랫동안 가톨릭 신자인 선수와 계약하지 않는 불문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1989년 레인저스는 셀틱 출신의 가톨릭 신자 모 존스턴과 계약하며 이러한 관습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에 팬들은 홈구장 밖에 모여 자신들의 시즌 티켓을 불태우며 강력히 항의했다. 심지어는 선수단 내에서도 반발이 나왔다. 존스턴과의 계약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에 참석한 레인저스 선수는 한 명도 없었다. 올드 펌, 엘 클라시코와 네덜란드의 아약스와 페예노르트 라이벌전을 경험한 스웨덴 출신의 헨릭 라르손은 올드 펌 더비를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꼽았다. 이탈리아의 밀라노 더비, 피오렌티나와 유벤투스의 라이벌 전과 올드 펌을 경험한 브리안 라우드럽도 라르손의 말에 동의했다. 두 클럽의 팬들은 라이벌 의식을 넘어 적대감을 오랫동안 보여왔다. 두 그룹에 속하는 사람들 간의 결혼도 드물었다. 올드 펌 더비 경기가 열리는 주말에는 평소보다 폭행사건이 9배가 증가하고, 1996년과 2003년도 사이에만 더비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8명의 팬이 숨졌다. 이러한 상황은 축구 스폰서십에 참가하려는 기업들에게도 골칫거리로 작용했다. 스폰서십에 참여하는 기업들은 팀에 대한 서포터스들의 열정이 스폰서인 기업에 장기적인 혜택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하지만 도시가 반으로 나뉘어 서로 적대감을 보이는 상황에서 기업이 한 클럽만 후원하면, 상대편 팀의 서포터스들을 적으로 만든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셀틱과 레인저스는 셔츠 스폰서십을 1984년 처음 도입했다. 유리 전문 기업 ‘CR 스미스’는 두 클럽을 동시에 후원했다. 이러한 공동 후원(joint sponsorship)은 계속해서 나타났다. 통신회사 NTL과 맥주회사 ‘칼링과 테넌츠’는 1999년부터 2013년까지 올드 펌 듀오인 레인저스와 셀틱의 셔츠 스폰서였다. 유럽의 어떤 라이벌 클럽들도 가져본 적이 없는 이러한 조인트 스폰서십을, 셀틱과 레인저스는 네 번이나 가진 것이다. 두 클럽 간의 라이벌 의식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스폰서 기업들은 한 클럽만 후원할 경우 라이벌 클럽 팬들한테 배척당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이러한 전략적 결정을 내린 것이다. 이러한 조인트 스폰서십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어땠을까? 통신회사 NTL의 공동 후원을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스폰서십을 통해 후원사의 인지도는 확실히 올라갔다고 한다. 하지만 공동 후원사인 NTL에 대한 팬들의 반응은 “좋기도 하지만 싫었다”고도 한다. 특히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거나 열정적인 팬일수록 이러한 공동 스폰서인 NTL에 대해 거부감을 더 느꼈다. 결국 인지도를 높이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에 따른 수익 창출에는 가시적인 효과를 보지 못한 NTL은 계약을 연장하지 않았다. 2011~12시즌 과도한 부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레인저스는 법정관리를 신청하였고, 승점 삭감 등의 중징계를 받았다. 새로운 구단주가 레인저스를 인수했다. 하지만 시즌이 종료된 후 클럽의 거취를 놓고 벌인 투표에서 레인저스는 4부 리그로 강등당했다. 하위 리그에서 좋은 성적을 낸 레인저스는 4년 만에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오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4년 동안 스코틀랜드 축구의 최고 히트 상품인 올드 펌 더비는 열리지 못했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2.03 06:00
해외축구

[이정우의 스포츠랩소디] 아일랜드 이민자들이 세운 명문 클럽, 셀틱 FC

유럽인들 중에서 한국인과 유사한 민족은 누구일까? 어떤 사람들은 이탈리아와 한국이 비슷하다고 말한다. 같은 반도 국가에, 날씨도 비슷한 편이고, 흥분 잘하는 국민성을 예로 든다. 하지만 아일랜드인이 한국인과 공통점이 더 많다는 주장이 더 설득력이 있다. 두 나라 국민은 자기 민족이 가장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애국심을 가지고 있다. 강대국에 끊임없이 시달려온 역사로 인해 두 민족에게는 한(恨)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정서도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악조건 속에서도 두 민족은 뛰어난 문화를 발전시켰고, 음주가무를 즐기는 국민성도 비슷하다. 발전 과정은 다르지만, 가난한 나라에서 선진국으로 도약 한 점도 두나라의 공통점이기도 하다. 우리 조상 중 상당수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외국으로 이주했듯이, 아일랜드도 뿌리 깊은 이민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지난 칼럼에서는 스코틀랜드로 이민 간 아일랜드인들이 설립한 하이버니안 FC에 대해 알아보았다. 라틴어로 아일랜드 섬을 의미하는 하이버니아(Hibernia) 말고도,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연관된 대표적인 이름이 바로 셀틱(Celtic)이다. 켈트족(Celts)과 관련된 유물은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서 발견된다. 이들은 기원전 3세기에 아일랜드와 영국을 포함해 알프스 산맥 북쪽의 유럽 대부분을 점령했다. 멀리는 동쪽의 터키 지역까지 진출했다. 기원전 1세기 줄리어스 시저의 로마 군대는 켈트족과 대대적인 전쟁을 벌여, 이들을 격파했다. 로마와의 전쟁에 패한 켈트족들은 영국 쪽 섬지방으로 이동했다. 기원전 55년부터 로마 제국의 라틴족은 여러 번 영국을 침공해 켈트족과 전쟁을 벌였고, 현재의 잉글랜드와 웨일즈 지역을 점령했다. 전쟁에 패한 켈트족은 북쪽이나 주변 섬 등의 오지로 피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제국은 결국 5세기 초반까지 약 400년 동안 스코틀랜드 지역을 제외한 브리튼(Britain) 섬을 다스렸다. 라틴족이 철수한 이후, 독일에서 건너온 게르만족의 한 파인 앵글로 색슨(Anglo-Saxon)이 브리튼 섬을 침공하면서 잉글랜드가 형성되었다. 그에 반해 켈트족은 아일랜드, 웨일즈, 스코틀랜드 지역에 자리 잡은 변방 종족이 되었다. Celt라는 명사에서 파생된 형용사가 Celtic이다. 오늘날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즈 등이 포함된 셀틱 국가들의 언어와 문화를 의미한다. Celtic이라는 단어가 셀틱(Seltic)혹은 켈틱(Keltic)으로도 발음되기에, 도대체 어느 발음이 맞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다. 결론부터 말하면 둘 다 맞다. S로 시작하는 발음은 불어 Celte에서 유래했다. 또한 영어의 발음 규칙에 의하면 알파벳 c 다음에 e 혹은 i가 오면 S로 발음한다. 영어 단어 cell, cereal, circus를 발음해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18세기에 들어 언어 역사학자들은 K 발음이 단어의 어원인 고전 그리스어와 라틴어를 더 잘 반영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현대 영어에서는 K 발음이 좀 더 널리 쓰인다. 단 미국프로농구(NBA)의 보스턴 셀틱스 등 스포츠팀에 한해서는 S 발음으로 사용된다. 1840년대 대기근의 영향으로 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로 이주한 이민자들의 상당수는 글래스고우에 정착했다. 1875년 에든버러에서 설립된 하이버니안 FC에서 영감을 받은 이들은 1887년 이민자들의 빈곤을 돋기 위한 기금 모금 수단으로 축구팀을 설립한다. 이 팀은 셀틱 FC라는 이름을 가졌는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의 뿌리인 켈트족의 이름을 딴 것이다. 셀틱은 이후 승승장구하며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명문 클럽으로 자리 잡았다. 셀틱은 1965년부터 1974년까지 9시즌 연속 우승이라는 대기록을 작성했고, 또한 영국 클럽으로는 최초로 1967년 유로피언 컵(UEFA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에서 우승하는 영광을 누렸다. 단일 시즌에 자국의 1부 리그 우승, FA 컵과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면 트레블(Treble)이라고 말하는데, 셀틱은 유럽 클럽 최초로 1966~67시즌에 이를 달성했다. 셀틱을 이야기할 때 ‘아덴라이 평원(The Fields of Athenry)’이라는 현대 민요를 빠뜨릴 수 없다. 대기근을 배경으로 한 이 노래의 가사는 마이클과 메리 부부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있다. 마이클은 굶주린 가족을 위해 옥수수를 훔치다 감옥에 갇힌다. 호주로 유배 가기 전날 마이클은 메리를 위로하면서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 달라고 부탁한다. 메리는 남편을 실은 배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이 노래는 1990년대 들어 아일랜드 축구대표팀과 셀틱 FC의 응원가로 채택되어 현재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UEFA 유로 2012에서 당시 최강 스페인과 붙은 아일랜드는 실력 차를 실감하며 0-4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일랜드 팬들은 자국의 예선탈락이 확정적인 후반 38분부터 종료 휘슬이 울린 후까지 '아덴라이 평원'을 열창해 전 세계 많은 축구 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당시 경기를 중계하던 독일 방송국의 해설진은 '아덴라이 평원'이 울려 퍼지는 동안 현장의 감동적인 모습을 시청자에게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말을 하지 않았다. 독일 축구 중계팀과 아일랜드 팬들의 합작으로 만들어낸 이러한 수준 높은 장면은 시청자와 현장을 하나로 묶는 품격 있는 방송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중계는 단순히 방송 기술의 향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축구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에서 출발하는 이러한 중계를 국내에서도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초창기 셀틱의 팬들은 스코틀랜드에 정착한 아일랜드 이민자들과 가톨릭 신자들이었다. 하지만 셀틱의 성장과 더불어 유럽, 북미, 오세아니아 등에 사는 아일랜드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팬으로 가세한다. 아울러 아시아, 아프리카 지역의 팬들까지 등장한다. 현재 셀틱은 전 세계에 걸쳐 200개가 넘는 서포터스 클럽을 거느린 글로벌 브랜드로 성장했다. 이정우 이화여대 국제사무학과 초빙교수 2021.01.27 06:00
연예

세계적인 여행 숙박 임대 사이트 홈어웨이,해외 커피도시와 카페 선정

오스트리아,대만,호주 3개국의 8개 카페 커피향과 함께하는 감성 가을 여행을 할 만한 곳은 없을까?글로벌 여행 숙박 임대 사이트인 홈어웨이(HomeAway®)는 16일 커피 향 가득한 오스트리아,타이페이,호주 3개국의 8개 카페를 추천,발표했다.. ▷달콤한 비엔나 커피의 탄생지, 오스트리아 ‘빈’커피 애호가라면 누구나 다 아는 ‘비엔나 커피’. 커피에 휘핑크림을 항상 얹어 놓는 게 한 때는 유행이 될 만큼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풍미를 담고 있는 비엔나 커피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 받아왔다. 비엔나 커피의 본 고장인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에는 ‘카페아우제(Kaffeepause)’라는 독특한 커피 문화가 있는데, 바로 오후 3시부터 5시까지 커피를 즐기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과거 오스트리아에서 택시 역할을 하던 마부들은 왼손으로 말 고삐를 잡아야 해서 다른 한 손에는 설탕과 생크림을 한번에 담은 커피를 들고 마셨는데 그 커피가 바로 ‘비엔나 커피’라고 한다. 우리에겐 ‘비엔나 커피’라는 명칭이 익숙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비엔나 커피는 ‘한 마리의 말이 이끄는 마차’라는 의미의 ‘아인슈패너(Einspannr)’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이번 가을, 아름다운 선율로 가득한 빈에서 3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빈의 카페 문화를 체험해보자. 가볼만한 카페 센트럴카페: 빈의 3대 카페 중 하나인 센트럴 카페는 1876년 개업한 이래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될 만큼 역사 깊은 장소다. 미술작가 클림트와 그의 연인 에밀리, 심지어는 히틀러까지 생전에 자주 갔던 곳이기도 하다. 누보 스타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카페 센트럴에서는 모카 블랙부터 럼주를 곁들인 아이스 커피까지 20여종에 이르는 커피를 맛볼 수 있다. 데멜카페: 센트럴카페와 함께 빈의 대표적인 카페로 명성을 유지해온 데멜 카페는 1786년에 지어져 오랫동안 철학가 및 부르주아를 위한 모임 장소로 이용되었다. 데멜 카페는 커피뿐만 아니라 초콜릿과 케익으로도 유명해서 테라스에 앉아 오픈 주방에서 케익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구경할 수도 있고, 디저트를 곁들인 따뜻한 커피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이다. 홈어웨이(HomeAway®) 빈 숙소 추천빈 Inner Stadt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 형태의 숙소를 추천한다. 1박에 약 22만원 정도면 주요 관광지와 가까운 빈 도심 중심에 위치한 위치한 침대 2개의 4인실 아파트를 빌릴 수 있기 때문에 볼거리가 넘쳐나는 빈을 여행하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적인 선택이다. 특히 빈의 명소 센트럴 카페, 데멜 카페 근처의 숙소는 커피를 사랑하는 여행자들에게 꼭 추천하는 곳이다. ▷다양한 시그니처 커피로 가득찬 대만 ‘타이페이’ 차(茶)문화의 중심지로 유명하지만, 대만의 커피 수입량과 커피 산업은 매년 빠른 성장률을 보이며 고유한 커피문화를 꾸준히 만들어 나가고 있다. USA Today가 선정한 세계 최고 커피도시 10 곳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한 대만 타이페이의 중산에 가면 유명한 카페거리가 있다. 낮에는 아기자기한 분위기의 거리가 밤에 가면 멋진 야경이 펼쳐지는 곳이다. 번화가에서 한 두 골목만 벗어나면 분위기 좋은 카페들이 곳곳에 숨어 있다. 타이페이 여행 중 잠시 쉬고 싶을 때 중산의 카페거리를 걸으며 대만 고유의 커피향을 느껴보는게 어떨까? 가볼만한 카페:멜란지 카페: 대만 여행자라면 꼭 둘러본다는 멜란지 카페는 유명한만큼 언제나 관광객과 현지인으로 붐비는 곳이다. 오너가 커피 무역업을 직접 하고 질 좋은 커피콩을 매입해 커피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품질에 있어서도 신뢰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멜란지 카페에서는 특히 13시간에 걸쳐 내리는 더치커피가 유명하고, 더치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딸기 와플이 대표 메뉴다. 카페 85℃: 대만에서 스타벅스보다 더 유명한 카페 85℃의 소금커피를 놓칠 수 없다. 소금과 생크림, 설탕이 커피와 어우려져 오묘한 맛을 내는 바닷소금 커피로 유명한 카페 85℃는 1,500원 정도의 저렴한 가격이며, 체인점이라서 도시 곳곳에서 즐길 수 있다. SPOT 타이페이 필름하우스: 중산 여행객들에게는 필수 코스가 된 필름하우스 카페는 예쁜 정원에 둘러싸인 건물로 실내 영화관을 갖추고 있어, 손님들이 영화를 즐기면서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기 좋은 곳이다. 과거엔 미국의 영사관이었던 공간이 카페로 탈바꿈해 현재는 복합 문화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분위기도 만끽하고 싶은 여행객에게 추천하는 곳이다. 홈어웨이(HomeAway®) 타이페이 숙소 추천타이페이 메인 역 인근의 스튜디오 형태 숙소를 추천한다. 공항, 지하철, 기차 등 다양한 교통수단이 집결된 금융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 습도가 높고 더운 날씨의 타이페이를 관광하는 여행객들이 지칠 때 잠시 숙소에 들러 휴식을 취할 수 있어 인기가 높다. 침실 1개를 갖춘 2인실 스튜디오를 1박 약 9만원 정도에 이용할 수 있다. ▷커피홀릭의 천국 호주 ‘멜버른’세계 커피 도시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호주. 호주의 커피 문화는 호주 초기 이민자들인 이탈리아 사람들에 의해 유럽 커피 문화를 기반으로 발달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커피 메뉴도 미국 등 다른 서양 국가와 조금 차이가 있다. 예를 들면, 호주에서는 아메리카노를 마시고 싶다면 진한 커피를 일컫는 ‘롱 블랙’이라는 커피를 주문해야 한다. 호주의 멜버른 골목에는 스트리트 아트와 앙상블을 이루는 유명한 카페 거리 ‘디그레이브 스트리트(Degraves Street)가 있다. ‘세상에서 커피를 가장 많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경험 할 수 있다는 디그레이브 스트리트에서 만나는 현지인들은 거의 대부분 한 손에는 커피를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노천카페 앞에서 커피를 마시며 여유롭게 책을 읽는 모습은 멜버른 시민들의 여유를 보여준다. 국내 유명 TV프로그램에도 등장한 케이크샵 과 야외 카페들이 펼쳐지는 골목에서 멜버니(멜버른 현지인)처럼 진한 모닝커피 한 잔과 함께 여행의 하루를 시작해보자. 가볼만한 카페:마켓레인커피: 호주인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손님들로 늘 북적이는 멜버른의 대표 카페 ‘마켓레인커피’에서는 품질 좋은 원두의 커피를 다양하게 만나볼 수 있다. 멜버른 시티 퀸 빅토리아 마켓 앞에 위치한 마켓레인커피는 원두를 직접 선별하여 바로 로스팅 해 줄 뿐만 아니라 주문한 커피에 대한 정보지도 함께 제공해서 알고 마시는 커피의 즐거움 또한 더해 준다. 카페 안디아모: 디그레이브 스트리트 초입에 있는 카페 안디아모는 커피뿐만 아니라 피자와 파스타가 맛있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거리를 걷다 출출해진 여행객들에게 인기가 높다. 여행하다 지칠 때 디그레이브 스트리트의 야외 테이블에서 맛있는 한 끼 후 커피 한 잔의 여유를 가져보자. 홈어웨이(HomeAway®) 멜버른 숙소 추천:멜버른 브런스윅 지역에 위치한 아파트 형태의 숙소를 추천한다. 1박에 22만원 정도에 넓은 테라스를 갖춘 4인실 고층 아파트에서 머물 수 있다. 멜버른에서 손꼽히는 유명 카페 및 레스토랑에 인접할 뿐만 아니라 숙소 내 테라스에서 바비큐 등 여가 생활도 즐길 수 있어 한층 더 유익한 여행을 만들어 줄 것이다. 2016.11.16 16:43
스포츠일반

애잔한 탱고의 선율에 젖어 보카항을 떠나지 못하네

아르헨티나의 부에노스아이레스는 100여 년 전 주린 배를 움켜쥔 채 아르헨티나 드림을 꿈꾸며 이탈리아·스페인 등지에서 몰려들었던 유럽 이민자들의 애환이 담겨 있는 곳이자 탱고의 발상지다. 19세기 말 스페인의 자취를 지워 버리고 파리를 능가하는 도시를 만들고자 도시 전체를 뒤집어 엎었던. 유럽보다 더 유럽다운 도시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여전히 탱고로 인해 빛을 발하고 있다. 아. 탱고! 이민자 애환 담긴 탱고 발상지 보카항부에노스아이레스에 도착하자마자 보카(La Boca)항으로 발길을 옮겼다. 시내의 남쪽. 광대한 라플라타강이 바다와 만나는 지점에 보카항은 자리 잡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오는 짠 바다 내음에 흐뭇한 미소가 떠오른 것도 잠시. 엄습하는 매캐한 시궁창 냄새에 그만 코를 감싸 쥐고 말았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을 사로잡았던 그 많던 북적거림은 다 어디로 갔는지 반쯤 물에 잠긴 채 녹슬어 가는 대형 화물선과 함께 보카항은 쓸쓸한 웃음만을 지어 보이고 있었다.바다를 등진 채 보카 거리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빨강·파랑·노랑의 화려한 원색으로 칠해진 판잣집들이 시선에 잡혔다. 그 옛날 보카항에 몰려든 이민 노동자들의 젊은 혈기는 추레한 판자집을 그 어떤 궁전보다도 더 화사한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보카항 한가운데 자리 잡은 조선소에서 쓰다 남은 페인트를 가져다 벽이며 지붕을 원색으로 색칠하기 시작한 그들의 매끈한 손놀림은 아직까지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두 블록 정도 더 걸어가자 보카 주니어스(Boca Juniors)스타디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마라도나가 꿈에서도 잊은 적이 없다고 고백했던. 남미 최고 축구 클럽의 홈구장이다. 보카 주니어스는 부자들이 사랑한 클럽이자 리버 플레이트(River Plate)에 맞서 전쟁과도 같은 100년을 흘려 보내며 그 명성을 더욱 높여 간 가난한 이민 노동자들의 축구팀이다. 스타디움 앞 기념품 가게에서 보카 주니어스의 유니폼을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막 도착한 5명의 앳된 청년들이 항구에 정박해 있는 스웨덴 국기를 본떠 만들었다는 유니폼. 고된 노동에 지쳤던 청년들은 주말이면 파랑과 노랑이 뒤섞인 이 유니폼으로 갈아 입고 꿈과 희망을 품고 뛰었을 것이다. 100년간 이어진 아스라한 함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자니 멀리 길모퉁이에서 애잔한 탱고의 선율이 들려온다. 갈수록 붉어지는 노을을 배경으로 그림 같은 탱고 스텝을 밟는 젊은 남녀의 그림자. 이제부터는 탱고의 시간이다.탱고에 취해 ‘7월 9일거리’로 나서다거리 곳곳에서 흘러나오는 탱고의 선율에 흠뻑 젖은 채 정신없이 걷고만 있었다. 가끔 콧속으로 흘러 들어오는 ‘좋은(Buenos)’. ‘공기(Aires)’가 몽롱하게 취한 이방인의 정신을 다잡아 줬다. 어느덧 보카 항구와 닿아 있는 산텔모 지구에 이르렀다.1870년 황열병이 이 도시를 덮쳤을 때 부자들이 모두 북쪽으로 이주해 버려 쓸쓸한 폐허로 남았던 곳. 팜파스에서 쫓겨난 혼혈 가우초(Gaucho·팜파스에서 소를 몰던 아르헨티나의 카우보이)들이 이곳에 흘러들면서 밀롱가(milonga)라는 전통 노래를 갖고 들어왔다 한다. 잇달아 보카에 자리를 잡은 이탈리아 이민 노동자들은 이 경쾌한 무곡에 애잔한 선율을 가미해 탱고라는 이제껏 그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격정의 춤을 창조해 냈다.조선소·피혁 공장·도살장에 둘러싸인 보카 지구를 삶의 터전으로 삼았던 이민 노동자들에게 밤늦게 맥주 한잔과 함께 누리는 탱고 가락은 지친 인생에 크나큰 위안이었을 것이다. 땀에 절은 작업복을 벗고. 화려한 수트로 갈아입은 채 보카 지구의 밤거리를 활보하던 이민 노동자들. 격정적 춤을 앞세워 항구의 창녀들을 유혹했던 청년들. 여성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탓에 뒷골목 으슥한 곳에서 동성 짝을 찾기에 여념이 없었던 슬픈 표정의 사람들. 초창기 탱고에는 이 모든 풍경들이 함께 담겨 때로는 애절하게. 가끔은 비정하게. 결국은 격정적으로 스텝을 밟아 왔다고 한다. 자정이 다 된 시각 물에 스며들 듯 조용히 들어선 탱고바에는 사람들의 물결로 촘촘했다. 아코디온을 독일식으로 변용한 악기 반도네온(Bandoneon)이 쉴새 없이 흐느끼고 있다. 몽롱한 눈망울의 부에노스아이레스가 아득한 옛날을 회상하고 있다. 미국·영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좋았던 시절. 소가죽만 벗기고 고기는 땅에 버릴 정도로 풍성했던 그 옛날. 끝 간데없이 추락한 현재의 아르헨티나가 역사상 최고의 탱고 가수 카를로스 가르델을 흉내내는 모창에 맞춰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가수가 무대에서 내려오자 바로 이어지는 격정의 춤 동작. 1930년대 파리로 수출돼 유럽에서 발달한 콘티넨탈(Continental) 탱고의 우아한 춤사위와 달리 아르헨티나 정통 탱고는 거의 90도로 꺾이는 절도 있는 동작이 인상적이다. 끊임없이 남성의 허리에 감기는 여성의 유려한 다리의 곡선. 붉은색 조명에 흔들리는 댄서의 서글프면서도 매혹적 표정. 끓어오르는 섹슈얼리티를 속으로 꾹꾹 눌러 담다가 한순간에 폭발시켜 버리는 스텝. 함께하고 있음에도 끊임없이 이별을 예감하는 듯한 서글픈 춤이 무대 위에 넘쳐 나고 있다.숨막힐 듯한 뜨거운 공기를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밖으로 뛰쳐나오고 말았다. 눈앞에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도로 ‘7월 9일거리’가 펼쳐졌다. 글=박지호(자유 기고가) 사진=박지훈(프리랜서)먹을거리 옛 영광은 빛이 바랬지만 아르헨티나는 여전히 인구 수보다 키우는 소의 숫자가 더 많은 대표적 목축 국가다. 이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은 바로 아사도. 소가죽을 팔아 생활하던 가우초들이 남은 고기를 야외에서 숯불에 구워 먹기 시작하면서 탄생했다고 한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처 팜파스 대농장에 들르면 예전 방식 그대로 구운 아사도를 맛볼 수 있다. 탱고바에서 ‘쉘 위 댄스’부에노스아이레스는 탱고의 도시다. 거리 어디에서도 애절한 선율에 맞춰 탱고를 추는 댄서를 만날 수 있다. 탱고의 발상지인 보카 지구에는 여전히 작은 탱고바들이 늘어서 있지만 안전 문제 때문에 가능하면 늦은 밤에는 방문을 피하는 것이 좋다. 시내 중심가에서 가까운 산텔모 지구나 몬세라트 지구에서는 상대적으로 편안하게 탱고 음악과 춤을 감상할 수 있다. 만약 탱고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싶다면 세뇨르 탱고극장이나 콤플레호 탱고극장 등 규모가 큰 탱고바로 가는 것이 좋다. 탱고의 탄생부터 최근의 트렌드까지 뮤지컬 형식으로 탱고의 모든 것을 보여 준다. 가격은 1인당 30~40달러 수준. 박지호 등 월간지에서 5년 동안 여행·문화 담당 기자로 근무했다. 평소 꿈꾸던 ‘라틴아메리카 100일 투어’를 위해 잠시 일을 중단하고 지난 7월부터 여행 중이다. 남미 7개국 각 도시에 얽힌 문화 이야기와 함께 건축가 오스카 니마이어. 작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영화감독 페르난도 메이렐레스 등을 인터뷰. 일간스포츠(IS)에 격주간으로 연재할 예정이다. 박정훈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원주민 사령관 인터뷰를 필두로 라틴아메리카 전문 프로랜서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난 6년간 라틴아메리칸의 삶과 자연을 렌즈에 담아 왔다. 2006.10.09 08:22
축구

[허진의 축구이야기]‘징크스’ 존중하되 두려워 말라

월드컵 때마다 회자되는 미신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다. 꼭 말하는 반대방향으로 실현되는 펠레의 저주나 골대를 자주 맞추면 패한다는 등속의 각종 징크스, 선수들 개개인의 습관과 결부된 우연과 필연의 가쉽거리들이 그것이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 정말 잔혹한 장난을 즐기게 만드는 운명의 신이 작용하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데, 특히 조편성 하나만 보아도 그렇다. 지난 대회 독일과 독일인 감독이 이끄는 카메룬의 대결, 스웨덴인 에릭손이 이끄는 잉글랜드와 스웨덴의 두 차례에 걸친 월드컵 조예선(잉글랜드는 1968년 이래 무려 37년간 스웨덴을 이겨 본 적이 없다!!),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이 다수 포진한 호주가 크로아티아와 한 조가 된 사연 등등, 보는 사람은 재밌지만 당사자들은 약간 머쓱한 운명의 대결구도가 그러하다. 물론 그들은 프로들이라 일단 필드에 서면 서로 야수처럼 충돌하기에 대부분은 우리가 염려하는 감성적 주저함은 찾아볼 수가 없다. 다만 예외적인 경우도 있는데 나폴리에서 너무나 사랑받던 마라도나가 90년 이탈리아와 준결승을 치룰 때, 엄청난 수의 나폴리 시민들이 조국인 이탈리아가 아닌 마라도나의 아르헨티나를 응원했다고 한다. 이런 경우 나폴리인들은 국가보다는 축구 그 자체를 더 높이 평가한다는 이야기가 된다.각 국가대표팀들의 지속적, 간헐적 징크스도 요사이 매스컴의 주요 밑반찬거리다. 상당한 잠재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메이저 대회에서 번번이 고배의 잔을 마시는 포르투갈. 세계 최강의 리그를 보유하면서도 언제나 8강 주변만을 맴도는 스페인. 대회 때마다 슬로우 템포와 엉성한 조직력으로 시작하다 막판에 기사회생하는 이탈리아. 거기다 개최국 독일은 2000년 10월 이래 소위 축구강국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번도 승리한 적이 없다. 말하자면 만성은 아니고 일시적 변비현상인데 이게 이번 대회에서 극복이 안되면 결국 &#39만성&#39이 될 소지가 높다. 그럼 우리 대표팀은 어떤가? 2002년 이전까지 5차례 본선진출했음에도 불구, 단 1승을 올리지 못했던 지긋지긋한 &#39징크스&#39는 4강 진출로 해소된 듯이 보인다. 한데 아직도 또다른 &#39징크스&#39가 우리를 배회하고 있음을 잊어선 안된다. 그건 아직도 한국이 적지에서 단 1승도 거두지 못했다는 &#39징크스&#39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다(?!!!). 본선을 앞두고 무슨 재수없는 소리냐 할지 모르지만, 32개국 중 가장 약체로 보이는 토고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오히려 경기운영을 그르치게 할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다.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은 이번 대회에 큰 부담없이 출전한다. 국민들의 기대치는 항상 높지만 주전의 부상 등 여러 이유로 해서 우승 가시권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오히려 이러한 현실을 감안한 겸허함이 팀에 좋은 결과를 가져다 줄 수 있을 것으로 예견하고 있다. 밑져 보아야 본전이라는…마지막으로 대 토고전을 앞두고 히딩크의 금언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그 어떤 경우라도 상대를 존중해라. 그러나 결코 겁먹지 말라. 너희들은 이길 수 있다."베를린에서(주 독일대사관 참사관·2002년 월드컵 대표팀 미디어 담당관)허진 2006.05.30 09:41
브랜드미디어
모아보기
이코노미스트
이데일리
마켓in
팜이데일리
행사&비즈니스
TOP